반도체 계약학과, 이번에도 의대에 밀렸다…삼성·SK, 우수 인재 확보 ‘비상’

시간 입력 2024-01-02 07:00:00 시간 수정 2023-12-29 1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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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계약학과 수시 충원율 100% 안팎
일부 대학선 최초 합격자 전원 등록 포기
채용 연계·해외 연수 등 혜택도 무용지물
반도체 기피 심화 우려↑…대책 마련 시급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세대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 나갈 우수 인재를 육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내 굴지의 대학과 손잡고 개설한 반도체 계약학과에 들어오는 학생들에 학비 면제, 채용 연계, 해외 연수 등 파격적인 혜택을 제시하고 나섰지만, 여전히 의대에 밀리면서 등록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속출하고 있다.

2일 각 대학에 따르면 올해 반도체 계약학과의 수시 충원율(모집 정원 대비 추가 합격자 비율)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수시에서 75명을 모집한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이달 28일까지 4차에 걸쳐 총 53명의 추가 합격자를 충원했다.

해당 학과 학생들은 삼성전자 채용이 보장된다. 그러나 해당 학과에서 53명의 추가 합격자가 나온 것으로 발표되면서 사실상 최초 합격자의 70.7%가 등록을 포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10명 중 7명은 ‘삼성전자 입사’라는 기회를 포기한 셈이다.

SK하이닉스와 연계된 고려대 반도체공학과는 이달 27일까지 3차에 걸쳐 19명의 추가 합격자를 충원했다. 수시에서 총 20명을 모집 중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최초 합격자 대부분이 반도체공학과를 외면한 것으로 나타났다. SK가 해당 학과 학생 전원에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데이비스캠퍼스(UC Davis)에서 수학할 수 있는 기회와 체류비 전액 지원 등을 골자로 한 파격 혜택을 내세웠지만, 이마저도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추가 합격자 수가 모집 정원을 넘긴 경우도 발생했다. 올해 수시에서 20명을 모집하는 서강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의 1~4차 추가 합격자는 총 32명으로 집계됐다. 또한 한양대 반도체공학과의 1~3차 추가 합격자는 총 56명으로, 모집 정원 32명의 두배 가까이 됐다.

이들 학과는 SK하이닉스와 손잡고 채용 조건형 계약학과로 개설됐다. 그러나 최초 합격자 모두가 SK 취업이 보장되는 해당 학과에 등록하지 않았다.

정부의 첨단 분야 육성 방침에 따라 새롭게 신설된 학과인 서울대 첨단융합학부도 등록 기피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첨단융합학부는 지난해 6월 윤석열 대통령의 주문으로 반도체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됐다. 정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첫 신입생을 모집한 첨단융합학부는 올해 수시(지역균형전형 및 일반전형)에서 128명을 모집키로 했다. 그러나 2차에 걸쳐 총 18명의 추가 합격자를 충원했다. 최초 합격자의 14.1%가 등록하지 않은 것이다.

3월 27일 광주과학기술원(GIST)에서 열린 삼성전자와 GIST 간 반도체 계약학과 신설 협약식. <사진=삼성전자>

뿐만 아니라 삼성전자가 반도체 고급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울산·대구·광주 등 3개 과학기술원(과기원)과 함께 설립한 반도체 계약학과에서도 추가 합격자를 충원해야 했다.

앞서 올해 초 삼성전자는 울산과기원(UNIST), 대구과기원(DGIST), 광주과기원(GIST) 등 과기원 세 곳과 반도체 계약학과 신설 협약을 맺고, 내년 3월부터 계약학과를 운영키로 했다.

과기원 세 곳에 신설되는 반도체 계약학과는 학사·석사 교육을 통합한 최초의 ‘학·석 통합 반도체 계약학과’ 과정으로, 교육 기간은 총 5년이다. 학·석사 과정을 통합해 우수 전문 인재를 원스톱으로 육성하기 위해 설립됐다. 이들은 전액 등록금과 장학금을 받을 수 있고,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으로 취업도 보장된다.

이같은 혜택에도 불구하고 과기원 세 곳의 반도체공학과 모두 3차까지 추가 합격자를 발표한 것으로 파악됐다. 다만 구체적인 현황은 공개되지 않았다.

대기업과 함께 협력해 만든 대학의 반도체 계약학과가 우수 학생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것은 의대, 치대, 한의대, 수의대, 약대 등 의·약학 계열로의 쏠림 현상이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이전에는 (수시로 최대 지원할 수 있는) 원서 6장 중에 의대, 첨단 분야 학과 등 여러 학과에 골고루 지원했다면 올해는 6장 원서를 모두 의대에 넣은 학생이 많아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이 앞장서서 반도체 계약학과를 만들고, 이를 통해 인재 확보에 힘쓰고 있지만 의대 등에 밀려 우수 학생 수급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지적했다.

SK하이닉스 반도체 생산 현장. <사진=SK하이닉스>

반도체 업계는 고급 인재들이 미래 성장동력인 반도체 산업을 기피하는 현상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미 반도체 관련 산업 현장에서는 인력 부족으로 신음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의 ‘산업기술인력수급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산업 기술 인력은 2021년 기준 10만4004명으로 집계됐다. 이중 첨단 기술 개발의 첨병 역할을 맡고 있는 석·박사급 인력은 2021년 기준 9170명(석사 6706명, 박사 2464명)으로 나타났다.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는 석·박사가 전체의 10%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비단 전문 인재만 부족한 것이 아니다. 국내 반도체 업계 전체 인력 부족 문제도 심화되고 있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최근 5년 간 반도체 산업 분야의 기술 부족 인력은 △2017년 1423명 △2018년 1528명 △2019년 1579명 △2020년 1621명 △2021년 1752명으로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일각에선 향후 10년 간 반도체 부문의 인력 부족이 3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내놓고 있다.

업계 안팎에선 성토의 목소리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반도체 인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박 부회장은 “반도체 계약학과에 입학하기로 한 학생들이 끝내 안 들어 왔다고 한다”며 “이같은 인재 이탈이 지속되면 2031년께 학·석·박사 기준으로 총 5만4000명 규모로 반도체 전문 인력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전문가들은 K-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선 정부가 업계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이를 토대로 우수 전문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기남 삼성전자 고문은 올 2월 한림대 도헌학술원 개원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 “반도체 첨단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인력이다”며 “우수한 인력을 통해 만들어진 최첨단 기술로 규모의 경제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삼성전자도 반도체 계약학과를 만드는 등 노력을 기울였는데 잘 안 된다”며 “기업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국가와 학계, 산업계가 공동으로 노력해 선순환 사이클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화성캠퍼스. <사진=삼성전자>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결국 인재를 활용하는 곳은 기업이다”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입맛에 맞게 전문 인력을 양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업계에 정통한 관계자는 “경기 평택, 용인 등에 수백조원 규모의 반도체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과 SK는 앞으로 우수 인재를 더욱 필요로 할 것이다”면서도 “그러나 인력 풀 자체가 너무 작아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이어 “반도체 업계 전반에 대한 처우 개선과 주요 사업장들이 위치한 지역의 생활 인프라를 개선하는 등 정부와 지자체, 기업이 모두 머리를 맞대야 하는 상황”이라고 주문했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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