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R&D 특별 연장 근로 인가 확대 지침, 14일 전격 실시
경제계 일제히 환영…“K-반도체 효율적 근로 시간 운영 기대”
여야 “정부 특례, 미봉책 불과…주 52시간제 예외 적용돼야”
반도체법 처리 놓고 여야 갈등…K-반도체 경쟁력 날로 약화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사진=삼성전자>
정부가 내놓은 반도체 연구개발(R&D)에 대한 특별 연장 근로 인가 제도 특례가 14일 본격 시행됐다. 경제계가 일제히 환영의 뜻을 내비친 가운데 이번 특례가 K-반도체의 첨단 기술 개발을 위한 마중물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다만 일각에선 정부의 이번 계책이 일시적 우회 조치에 불과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에 여야 간 의견 상충으로 표류하고 있는 반도체 특별법이 서둘러 통과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특별 연장 근로 1회 최대 인가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는 내용의 ‘반도체 R&D 특별 연장 근로 인가 제도 업무 처리 지침’이 이날부터 전격 실시됐다.
이번 지침은 이달 1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관계장관회의 겸 경제장관회의 겸 산업경쟁력강화관계장관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반영해 신설된 것으로, 반도체 R&D 분야에만 적용됐다.
특별 연장 근로 인가 제도는 불가피하게 법정 연장 근로 시간을 초과할 경우 근로자 동의 및 고용노동부(노동부) 장관 인가 절차를 거쳐 주 52시간을 초과해 최대 64시간까지 연장 근로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1회당 인가 기간을 기존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고, 건강 보호 조치 등 필수 요건 외 재심사 기준을 간소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기존에 R&D를 목적으로 한 특별 연장 근로 인가 제도의 1회 최대 인가 기간은 3개월이었다. 연간 최대 3회까지 연장할 수 있어 심사만 통과한다면 1년 내내 최대 주 64시간 근무가 가능했다.
문제는 해당 제도의 요건이 까다로웠다는 점이다. 실제로 지난해 R&D를 위한 특별 연장 근로 인가 제도 사용은 전체의 0.5%에 불과했다.
이에 정부는 1회 최대 인가 기간을 6개월로 확대해 한 차례만 연기하더라도 1년 내내 주 64시간 근무가 가능하도록 특례를 신설했다. 특히 심사 기준을 낮춰 보다 용이하게 특별 연장 근로 인가 제도를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월 11일 경기 성남시 판교에 위치한 동진쎄미켐 R&D센터에서 열린 ‘반도체 R&D 근로 시간 개선 간담회’. <사진=연합뉴스>
정부 결정에 경제계는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먼저 K-반도체를 대표하는 한국반도체산업협회(반도체협회)는 이번 특례로 반도체 기업의 효율적인 근로 시간 운영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도체협회는 “반도체 업계는 정부의 특별 연장 근로 제도 개선 결정을 적극 환영한다”며 “이를 통해 반도체 산업의 R&D 및 생산 활동이 더욱 유연하게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특례는 K-반도체가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며 “반도체 업계는 정부의 이번 결정을 토대로 R&D 및 생산 혁신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고 전했다.
경제단체들도 정부의 이번 제도 개선을 환영했다. 이종명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산업혁신본부장은 ‘특별 연장 근로 제도 개선안 관련 코멘트’에서 “국가 간 기술 패권 경쟁으로 확대되는 반도체 산업 현장에서 정부가 발표한 특별 연장 근로 확대가 반도체 R&D 역량을 강화할 방안의 하나라는 점에서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상호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도 ‘반도체 R&D 특별 연장 근로 인가 제도 보완 방안에 대한 경제계 입장문’에서 “글로벌 수요 둔화, 공급망 불안, 후발국의 추격 등 K-반도체가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정부가 이번 특례 시행을 결정한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는 “연구 현장의 근로 시간 제약이 다소나마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며 “기술 혁신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의미 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고 기대했다.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오른쪽)이 2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날 반도체 R&D 특별 연장 근로 인가 제도 업무 처리 지침이 본격 시행되면서 경제계는 당장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며 안도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번 정부 결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더불어민주당 전국노동위원회는 성명을 내고 “6개월에 6개월 연장까지 허용하겠다는 것은 결국 1년 내내 근로기준법을 무시한 특별 연장 근로가 가능하게 하겠다는 의미다”며 “1919년 ILO(국제노동기구)가 1호 협약으로 1일 8시간, 주 48시간을 채택한 이래 세계 각국은 지난 100여 년 간 인간다운 삶과 업무 능률 향상을 위한 근로 시간 단축에 매진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정부 결정은 노동의 역사적인 발전을 100년 전으로 되돌리는 퇴행적인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 소속 야당 의원들도 입장문을 통해 “현재의 특별 연장 근로 인가 제도 내에서도 충분히 근로 시간 확대 운영이 가능한데도 정부 스스로 이를 무력화했다”며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근로자들의 희생과 산업의 경쟁력 저하뿐이다”고 지탄했다.
그러면서 “장시간·압축 노동과 과로사를 조장하는 이번 정부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비단 야당뿐만 아니다. 여당도 정부가 마련한 특별 연장 근로 인가 제도 특례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입장이다. 제도 기준 완화는 미봉책일 뿐 당장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이 더 시급하다는 것이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 소속 한 여당 의원은 “HBM(고대역폭메모리)을 비롯한 현재 시장을 주도하는 반도체 기술은 하루 이틀 개발로 나온 것이 아니다”며 “주 52시간제 시행 전 밤낮 없는 R&D를 통해 만든 결과물이 이제야 시장에서 빛을 본 것이다”고 밝혔다.
이어 “반도체 R&D 분야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선 6개월 단위의 특별 연장 근로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 일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주는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며 “주 52시간제 예외가 서둘러 적용돼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사진=SK하이닉스>
비록 이유는 다르나 여야 모두 정부의 특별 연장 근로 인가 제도 특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정부 결정은 여야의 끝없는 대립에서 도출된 결과물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여야가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두고 날선 공방을 벌이는 탓에 처리가 시급한 반도체 특별법의 국회 통과 시점이 기약 없이 미뤄지면서, 정부가 임시방편으로 특례를 내놓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업계는 반도체 R&D 종사자에 대한 주 52시간제 예외가 당장 적용돼야 한다고 성토하고 있다. 골든 타임을 톻칠 경우, K-반도체의 첨단 기술 개발 경쟁력을 담보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통상 2년이 소요되는 반도체 신제품 개발 과정 중 시제품 검증에만 6개월에서 1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된다. 이 기간 중 R&D 핵심 인력은 시제품 집중 검증을 위해 3~4일 밤샘 근로가 불가피하다는 게 업계의 입장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일본·대만 등 주요 경쟁국은 반도체 R&D 인력의 무제한 근무를 허용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엄격한 주 52시간제로 인해 R&D 핵심 인력 운용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사진=삼성전자>
주 52시간제로 인해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에 차질을 빚는 사이 K-반도체가 중국에 역전을 허용했다는 참담한 분석도 제기됐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간한 ‘3대 게임 체인저 분야 기술 수준 심층 분석’ 브리프에 따르면 국내 전문가 3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 지난해 기준 한국의 반도체 분야 기술 기초 역량은 모든 분야에서 중국에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고 기술 선도국을 100%로 봤을 때, 고집적·저항기반 메모리 기술 분야는 한국이 90.9%로, 중국의 94.1%보다 낮았다. 한국의 고성능·저전력 AI(인공지능) 반도체 기술 분야는 84.1%인 반면 중국은 88.3%로 더 높았다.
전력 반도체 분야의 경우도 한국 67.5%, 중국 79.8%로, 중국이 우위를 점했고, 차세대 고성능 센싱 기술 분야도 중국(83.9%)이 한국(81.3%)에 앞섰다. 반도체 첨단 패키징 기술은 한국과 중국이 74.2%로 같게 평가됐다.
기술 수준을 사업화 관점에서 평가했을 때, 한국은 고집적·저항기반 메모리 기술, 반도체 첨단 패키징 기술 분야에서만 중국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뿐만 아니라 앞서 2022년 진행된 조사에도 참여했던 전문가들은 당시 고집적·저항기반 메모리 기술, 반도체 첨단 패키징 기술, 차세대 고성능 센싱 기술 분야 등은 한국이 중국에 앞서 있다고 평했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에 한·중 간 위상이 뒤바뀌었다고 진단했다.
경제계는 첨단 칩 경쟁력 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반도체 특별법을 서둘러 처리할 수 있도록 여야 간 초당적 협력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종명 본부장은 “국회에서 논의 중인 반도체 특별법이 국내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원만히 협의돼 조속히 통과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