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제외 반도체법 추진
국힘 강하게 반발…“핵심 빼면 ‘반도체 보통법’ 전락”
반도체법 처리 ‘올스톱’ 우려…삼성·SK, 경쟁력 잃을 판
한국, 中에 반도체 기술 기초 역량 전 분야서 뒤처져
위기의 K-반도체…“여야 초당적 협력, 법안 처리해야”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사진=삼성전자>
미국, 일본, 중국 등 세계 주요국들이 반도체 경쟁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과 달리, 그간 글로벌 시장을 선도해 온 우리나라는 첨단 칩 역량 제고에 우려스러울 만큼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여야 간 힘겨루기가 장기화하면서 이른바 ‘반도체 특별법(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 및 혁신 성장을 위한 특별법안)’ 국회 처리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특히 반도체 업계에 대한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적용을 놓고 여야 간 평행선을 달리면서, 당장 K-반도체가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8일 정치권과 업계 등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은 반도체 특별법을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하루 전인 27일 정책조정회의에서 “반도체 특별법의 경우 국민의힘의 몽니 때문에 협상이 진척되지 않고 있다”며 “민주당은 반도체 특별법을 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해 추진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의힘이 제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의 법정 심사 기간 180일이 지나면 지체 없이 처리될 것이다”고 못박았다.
민주당이 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하는 반도체 특별법에는 그간 야당의 주장대로 반도체 산업 지원책은 포함하되,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조항은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조항을 반드시 담아야 한다는 국민의힘의 입장과 상충된다. 그간 국민의힘은 연구개발(R&D) 핵심 인력의 근로 시간 제약으로 인해 반도체 산업 경쟁력이 약화될 위기에 처한 만큼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를 반도체 특별법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를 고려할 때 국회 산자위원장인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은 산자위 전체회의에 민주당 법안을 상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에 패스트트랙 규정을 이용해 180일 후 상임위에 자동 상정시켜 민주당 단독안을 처리하겠다는 게 진 정책위의장의 설명이다.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이 2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민주당이 패스트트랙을 통해 반도체 특별법을 단독 처리할 조짐을 보이자 여당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경기 화성의 한 반도체 기업을 방문한 후 취재진들과 만난 자리에서 야당이 반도체 특별법에서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조항을 빼려는 데 대해 “주 52시간제 예외가 안 되면 말 그대로 반도체 특별법이 아니라 ‘반도체 보통법’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권 비대위원장은 “필요할 때 단기에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반도체 기업의 생존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2~3년이라도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반드시 관철할 필요가 있겠다”고 말했다.
권 비대위원장은 앞서 업체 관계자와의 간담회에서 “반도체 특별법은 현재 야당에 발목 잡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며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두고 오락가락 행보를 보이다가, 결국 이를 제외하고 패스트트랙으로 강행 처리한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반도체 산업 특성을 무시한 무책임한 처사다”고 지탄했다.
여야가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두고 날선 공방을 벌이는 동안, 당장 처리가 시급한 반도체 특별법의 국회 통과 시점만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다.
해당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한국과 미국에 대규모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투자비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또한 반도체 R&D 종사자에 대한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으로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첨단 반도체 개발 속도도 한층 빨라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그러나 탄핵 정국과 여야 갈등으로 반도체 특별법 처리는 사실상 ‘올스톱’ 될 위기를 맞고 있다.

반도체 특별법 통과를 손꼽아 기다렸던 삼성, SK 등 K-반도체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먼저 첨단 반도체 경쟁력을 서둘러 끌어올려야 하는 삼성·SK가 반도체 특별법에 따른 반도체 직접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할 경우, 글로벌 업체들과의 반도체 주도권 다툼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실제, 미국, 일본 등 주요국은 자국 반도체 업체에 보조금을 지급하며 첨단 칩 역량 제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의 ‘주요국 첨단 산업별 대표 기업 지원 정책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미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 업체인 인텔에 85억 달러를 지급했다. 일본 정부도 라피더스에 63억4000만달러의 보조금을 투입했다.
그러나 같은해 우리 정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보조금을 일절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 간접 지원만을 고수하는 정책 기조로 인해 K-반도체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요국의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 기조는 지난해에도 이어졌다. 미국은 메모리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에 61억6500만달러를 보조금으로 지급했다. 일본은 지난해 11월 일 반도체 산업에 10조엔을 지원하는 종합 경제 대책을 새로 발표했다. 중국도 역대 최대 규모인 64조원의 반도체 투자 기금 ‘빅펀드’를 조성한 상태다.
이와 달리, 현재 우리나라의 반도체 관련 인센티브 규모는 세액 공제를 포함해도 1조2000억원 수준에 그친다.
다행스러운 점은 국내 반도체 업체의 공장 증설 등 통합 투자 세액 공제 혜택을 강화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K-칩스법)’이 하루 전인 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것이다.
이번 개정안이 국회의 문턱을 넘으면서 대·중견기업 15%, 중소기업 25% 등 반도체 기업의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 공제율은 각각 20%와 30%로 높아지게 됐다. 이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K-반도체의 대규모 투자 비용 부담을 덜어 줄 단비가 될 전망이다.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 ‘NRD-K’. <사진=삼성전자>
또한 반도체 R&D 종사자에 대한 주 52시간제 예외가 적용되지 않을 때에도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K-반도체의 첨단 기술 개발 경쟁력을 담보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통상 2년이 소요되는 반도체 신제품 개발 과정 중 시제품 검증에만 6개월에서 1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된다. 이 기간 중 R&D 핵심 인력은 시제품 집중 검증을 위해 3~4일 밤샘 근로가 불가피 하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실제 미국·일본·대만 등 주요 경쟁국도 이런 이유 때문에 반도체 R&D 인력의 무제한 근무를 허용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엄격한 주 52시간제로 인해 R&D 핵심 인력 운용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직접 보조급 지급 지연, 주 52시간제 등으로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에 상당한 제약이 뒤따르면서 K-반도체가 중국에 역전을 허용했다는 참담한 분석도 제기됐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간한 ‘3대 게임 체인저 분야 기술 수준 심층 분석’ 브리프에 따르면 국내 전문가 3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 지난해 기준 한국의 반도체 분야 기술 기초 역량은 모든 분야에서 중국에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고 기술 선도국을 100%로 봤을 때, 고집적·저항기반 메모리 기술 분야는 한국이 90.9%로, 중국의 94.1%보다 낮았다. 한국의 고성능·저전력 AI(인공지능) 반도체 기술 분야는 84.1%인 반면 중국은 88.3%로 더 높았다.
전력 반도체 분야의 경우도 한국 67.5%, 중국 79.8%로, 중국이 우위를 점했고, 차세대 고성능 센싱 기술 분야도 중국(83.9%)이 한국(81.3%)에 앞섰다. 반도체 첨단 패키징 기술은 한국과 중국이 74.2%로 같게 평가됐다.
기술 수준을 사업화 관점에서 평가했을 때, 한국은 고집적·저항기반 메모리 기술, 반도체 첨단 패키징 기술 분야에서만 중국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뿐만 아니라 앞서 2022년 진행된 조사에도 참여했던 전문가들은 당시 고집적·저항기반 메모리 기술, 반도체 첨단 패키징 기술, 차세대 고성능 센싱 기술 분야 등은 한국이 중국에 앞서 있다고 평했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에 한·중 간 위상이 뒤바뀌었다고 진단했다.

SK하이닉스 이천사업장. <사진=SK하이닉스>
경제계는 첨단 칩 경쟁력 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반도체 특별법을 서둘러 처리할 수 있도록 여야간 초당적 협력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종명 대한상공회의소 산업혁신본부장은 “국회에서 논의 중인 반도체 특별법이 국내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원만히 협의돼 조속히 통과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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