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국 반도체·AI 분야에 수년 간 10조엔 공적 지원
첨단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 등에 보조금 지급 염두에 둬
미·일 모두 수십억달러 투입…삼성·SK 보조금은 ‘제로’
“첨단 반도체 역량 강화 위해선 보조금 직접 지원 필요”
여당, 반도체특별법 발의 ‘긍정적’…국회 통과는 미지수
세계 주요 국가들이 ‘미래 산업의 쌀’인 반도체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파격적인 지원 대책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반도체 보조금 정책에 가장 적극적인 미국은 ‘반도체 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에 따른 대규모 보조금 지급을 약속하며 자국 반도체 생산 능력을 빠르게 강화해 나가고 있다.
최근엔 반도체 변방 국가로 추락한 일본도 범 국가 차원의 보조금을 지원하며 반도체 산업 부활에 나섰다. 일본은 10조엔(약 91조2350억원)을 투입해 AI(인공지능)와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미국·일본 기업들이 자국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 지원에 힘입어 반도체 산업 부활에 나선 가운데, 정작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렇다할 지원없이 경쟁사들의 추격을 허용할 위기에 처했다. 한국 정부는 여전히 반도체 기업에 세액 공제 등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최근 여당이 주도해 이른바 ‘반도체특별법’을 발의했지만, 국회의 문턱을 넘기까지 상당 시일이 소요될 전망이어서, 범 국가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는 경쟁국과 큰 대조를 보이고 있다.
12일 교도 통신, 니혼게이자이(닛케이) 신문 등 일본 매체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반도체와 AI 분야에 수년 간 10조엔을 공적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AI·반도체 산업 기반 강화 프레임’이라는 명칭의 이번 지원 계획은 2030년 회계연도(2030년 4월~2031년 3월)까지 수년 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직접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 골자다. 아울러 향후 10년 간 총 50조엔(약 456조4600억원)이 넘는 민·관 투자도 이끌어낸다는 목표도 설정했다. 일본 정부는 이에 따른 경제적 파급 효과가 160조엔(약 1460조256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번 지원 계획은 일 정부가 주도해 설립한 첨단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 등에 보조금 지급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직접 보조금 뿐만 아니라 정부 기관을 통한 출자, 민간 융자에 대한 채무 보증 등도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교도 통신은 이와 관련해 “일본 정부가 이달 중 정리할 경제 대책에 이번 계획을 포함시킬 것으로 보인다”며 “라피더스 지원을 위한 법안도 내년 정기 국회 제출을 목표로 한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의 보조금 지원은 라피더스의 반도체 역량 강화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라피더스는 지난 2022년 11월 토요타와 소니, 소프트뱅크, 키옥시아, NTT, NEC, 덴소, 미쓰비시UFJ은행 등 일본 기업 8개사가 공동 설립한 차세대 반도체 기업이다. 이들 기업의 투자금은 총 73억엔(약 667억원)에 달한다.
주목할 점은 일본 정부가 라피더스 출자금의 약 1400배에 달하는 재원을 공적 지원하겠다고 공언했다는 것이다. 물론 10조엔이 모조리 직접 보조금으로 지급되지는 않겠지만 상당 액수를 지원 받을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라피더스의 반도체 경쟁력은 예상을 뛰어 넘어 훨씬 빠른 속도로 전개될 것이란 분석이다.
일본의 자국내 반도체 산업 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의 ‘주요국 첨단 산업별 대표 기업 지원 정책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지난해 반도체 산업 재부흥을 목적으로 라피더스에 63억4000만달러(약 8조9064억원)의 보조금을 투입했다.
미국에 이어 일본도 자국 반도체 업체에 보조금을 지급하며 첨단 칩 역량 제고에 사활을 건 가운데, 정작 K-반도체는 간접 지원만을 고수하는 정책 기조로 인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경협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미 정부는 자국 반도체 업체인 인텔에 85억달러(약 11조9383억원)를, 일 정부는 라피더스에 63억4000만달러를 지급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보조금을 일절 지급하지 않았다.
다만 정부는 지난 5월 17조원 규모의 ‘반도체 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포함해 총 26조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 지원 방안을 내놨다.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반도체는 국가 총력전이 전개되는 분야”라며 “금융·인프라·연구개발(R&D)은 물론 중소·중견기업 지원까지 아우르는 반도체 산업 종합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해당 지원책을 살펴본 반도체 업계는 “환영한다”는 입장을 내비치면서도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정부가 직접적인 보조금 지급은 없다는 기존의 입장을 재차 고수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반도체 업체에 대한 세액 공제와 관련해 “R&D와 설비 투자금의 일정 비율을 국가가 환급해 주는 것은 보조금이나 다를 바 없다”며 “올해 일몰되는 세액 공제를 연장해 기업이 R&D와 설비 투자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 일본 등 주요국과 달리 우리 정부는 실효성이 떨어지는 세액공제 정책만을 지속하겠다는 입장만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업계 안팎에선 K-반도체가 AI 시대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과감한 보조금 지원 방안을 수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경협은 “주요국의 반도체 산업 정책의 공통점은 정부 개입을 통한 경제 성장 달성이다”며 “특히 보조금 정책을 주로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선점 효과와 승자 독식 양상을 보이는 첨단 산업에서 가격 경쟁력과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보조금 정책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한경협은 이어 “급격한 기술 발전과 공급망 재편에 선제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점에서 첨단 산업에 대한 직접적인 보조금 지원은 안보 및 글로벌 공급망 측면에서 한국이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위기를 의식한 듯 최근 정치권에서는 삼성, SK 등 국내 반도체 업계를 직접 지원할 수 있는 법안을 발의하고, K-반도체의 첨단 칩 역량을 강화시키는 조력자가 되겠다고 자처했다.
지난 11일 국민의힘은 반도체 보조금 등 정부의 재정 지원 근거 조항, 주 52시간 근무 예외 조항 등을 담은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 및 혁신 성장을 위한 특별법(반도체특별법)’을 당론 발의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장인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 발의한 반도체특별법은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지자체)가 전력·용수 등 산업 기반 시설을 신속하게 조성·지원하고, 여기에 필요한 보조금 등 재정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골자다.
또 반도체 R&D 종사자에 대해 노사 당사자 간에 합의가 있을 경우 주 52시간제를 적용 받지 않도록 예외를 둘 수 있게 했다.
이 의원은 법안 제안 이유에서 “선진 경쟁국들의 글로벌 반도체 경쟁은 국가의 운명을 건 ‘국가 대항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며 “그러나 우리 정부 정책은 세액 공제 등 간접 지원에 제한돼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도전을 맞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반면 미국·일본 등 주요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천문학적인 보조금까지 지급하며 투자 유치와 자국 내 생산 시설 건설, 수출 확대 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짚었다.
이 의원은 “반도체 산업 경쟁력은 국가 경쟁력과 미래와 직결된다”며 “국가 차원의 실효적 지원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반도체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국민의힘은 다음달 9일 종료되는 정기 국회 회기 내에 반도체특별법 통과를 목표로 신속 처리 안건 지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다만 반도체특별법이 국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야당이 보조금 직접 지원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 52시간제 특례 조항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이와 관련해 이 의원은 “보조금 지원은 강제 규정이 아닌 임의 규정이다”고 설명했다. 또 “반도체 R&D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해 당사자 합의에 기초해 탄력적으로 적용하게끔 한 것이다”고 전했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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