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SK그룹 편입 후 12여 년 만 글로벌 AI 메모리 리더 도약
최태원 대규모 투자로 HBM 등 기술 개발 속도…그룹 핵심 축 부상
직접 발로 뛰는 최태원, 네트워킹 뒷받침…AI 칩 주도권 확보 앞장
‘회복 불능’ 부실 기업으로 낙인 찍혔던 한 반도체 기업이 글로벌 AI(인공지능) 메모리 리더로 우뚝 섰다. 1983년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이후 오랜 기간 부실 기업 딱지를 떼지 못하다 2012년 SK그룹에 편입된 SK하이닉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SK그룹의 식구가 된 SK하이닉스는 2012년 당시만 해도 2000억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내며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속을 태웠다. 극심한 실적 부진과 한계 기업이란 타이틀에 경영진 상당수의 반대를 무릅 쓰고 인수를 단행한 최 회장은 그룹 안팎의 비판을 묵묵히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12년이 흐른 지금 SK하이닉스는 세계 3위 반도체 업체로 도약하며, AI 시대 SK그룹의 핵심 기업으로 부상했다. 오늘날 SK하이닉스는 경쟁자인 삼성전자에 이어 시가총액(시총) 2위 기업에 랭크돼 있고, 올 3분기엔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하며 ‘AI 메모리 최강자’로 발돋움했다. SK하이닉스의 눈부신 성장 뒤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글로벌 AI 리더십과 뚝심 있는 투자가 뒷받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25일 재계에 따르면 지난 2012년 최 회장은 SK의 미래 먹거리 중 하나로 반도체를 낙점하고, SK하이닉스(옛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했다.
반도체는 고(故) 최종현 회장이 선경반도체를 설립하며 진출했던 사업 분야다. 그러나 당시 제2차 오일 쇼크가 닥치며 SK는 반도체 사업을 접어야 했다.
전례를 교훈 삼아 최 회장은 2010년 전문가를 초청해 서울 모처에서 반도체 공부 모임을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은 반도체 시장의 미래와 SK하이닉스 인수의 실익을 검토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SK하이닉스는 채권단 관리를 받으며 연간 2000억원대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한 최 회장은 주변의 반대에도 약 3조5000억원을 들여 SK하이닉스를 전격 인수했다.
인수된 지 12년이 훌쩍 지난 지금 최 회장의 뚝심은 적확하게 들어맞았다. SK하이닉스는 끊임없는 노력과 혁신을 통해 글로벌 톱 AI 메모리 기업으로 거듭났다. 특히 AI 열풍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HBM 시장에서 독보적인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SK하이닉스의 ‘HBM 성공 신화’는 15년 전인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SK는 TSV(실리콘관통전극)과 WLP(웨이퍼레벨패키지) 기술이 메모리 성능의 한계를 극복해 줄 것으로 판단하고, HBM 개발에 적극 매진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2013년 세계 최초로 TSV와 WLP 기술에 기반을 둔 1세대 HBM이 첫 선을 보였다. HBM은 출시 당시 혁신 메모리로 주목 받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예상보다 미미했다. HBM이 널리 쓰일 만큼 HPC(고성능컴퓨팅) 시장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SK하이닉스는 후속 기술 개발을 이어 나갔다. SK는 열 방출과 생산성이 높은 MR-MUF(매스리플로우-몰디드언더필) 기술을 ‘HBM2E’에 적용해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이후 얇은 칩 적층, 열 방출, 생산성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어드밴스드 MR-MUF 기술을 4세대 HBM ‘HBM3’와 5세대 HBM ‘HBM3E’에 적용했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지난해 24GB HBM3 12단 제품을, 최근에는 36GB HBM3E 12단 제품 양산에 성공하며 HBM 선두 지위를 공고히 다졌다.
SK하이닉스의 HBM 역량이 업계 최고 수준으로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은 최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다. 2012년 SK그룹에 편입된 이후 SK하이닉스는 그룹의 안정적인 투자 덕에 HBM 기술 개발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룹사 차원의 공격적인 투자 기조는 성공적인 경영 실적으로 이어졌다. SK그룹에 인수되기 전만 해도 만년 적자 기업으로 낙인 찍혔던 기업은 SK그룹에 편입된 이후인 2012년 4분기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이후 지독한 반도체 한파였던 지난해를 제외하고 흑자 기조를 지속했다.
최 회장의 한결 같은 투자가 SK하이닉스의 성장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SK 경영진들의 입을 통해 여실히 입증됐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올 5월 경기 이천본사에서 ‘AI 시대, SK하이닉스 비전과 전략’을 주제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AI 반도체 경쟁력은 한순간에 확보할 수 있는 게 아니다”며 “오랜 기간 갈고 닦아 온 D램 기술력을 바탕으로 HBM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이어 “SK하이닉스가 SK그룹에 편입된 게 2012년인데, 그때부터 메모리 업황이 좋지 않아 대부분의 반도체 업체들이 투자를 10% 이상씩 줄였다”면서도 “그러나 최 회장과 SK그룹은 투자를 늘리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투자는 전 분야에 걸쳐 이뤄졌고, 거기에는 시장이 언제 개화할지 모르는 HBM에 대한 투자도 포함됐다”며 “그 결과, 2013년 세계 최초로 HBM을 개발하는 성과를 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지속적인 연구개발(R&D)에 이어 고객사들과의 긴밀한 협업도 잘 이뤄져 지금의 HBM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글로벌 HBM 시장에서 SK의 지배력은 상당하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SK하이닉스의 전 세계 HBM 시장 점유율은 53%로, 이미 절반을 넘겼다.
최 회장은 SK하이닉스를 필두로 AI 리더십을 강화하겠다고 승부수를 띄운 상태다. 최 회장은 올 6월 경기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2024 경영전략회의’에서 “‘새로운 트랜지션(전환) 시대’를 맞아 미래 준비 등을 위한 선제적이고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며 “지금 미국에서는 ‘AI 말고는 할 얘기가 없다’고 할 정도로 AI 관련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룹 보유 역량을 활용해 AI 서비스부터 인프라까지 ‘AI 밸류체인(가치 사슬) 리더십’을 강화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최 회장의 강력한 의지에 맞춰 SK는 AI·반도체 투자를 통해 △HBM을 중심으로 한 AI 칩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로 꼽히는 AI 데이터센터 △개인형 AI 비서(PAA)를 포함한 AI 서비스 등 AI 밸류체인을 더욱 정교화하고,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그 일환으로 SK하이닉스는 2028년까지 향후 5년 간 총 103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사업 경쟁력을 강화키로 했다. 이 중 HBM 등 AI 관련 사업 분야에만 약 80%(82조원)의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다.
이뿐만 아니다. 최 회장은 직접 발로 뛰며 AI 반도체 사업을 꼼꼼히 챙기고 있다. 앞서 올 8월 최 회장은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를 방문해 HBM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AI 메모리 분야 사업 현황을 점검했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은 차세대 AI 메모리 역량을 더욱 제고하자고 주문했다. 최 회장은 “최근 해외 빅테크들이 SK하이닉스의 HBM 기술 리더십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이는 3만2000명 SK하이닉스 구성원들의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의 성과인 동시에 우리 스스로에 대한 믿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내년에 6세대 HBM인 ‘HBM4’를 조기 상용화해 대한민국의 AI 반도체 리더십을 지키자”며 “국가 경제에도 기여해 나가자”고 힘줘 말했다.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에도 적극 힘쓰고 있다. 최 회장은 글로벌 빅테크 CEO(최고경영자)와의 연쇄 회동 등을 통해 AI 반도체 리더십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최 회장은 올 4월 미국 앤비디아 본사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를 만나 글로벌 AI 동맹 구축 방안을, 6월에는 대만을 찾아 웨이저자 TSMC 회장과 양사 간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또 올 6월 말부터 약 2주 간 미국에 머물며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인텔 등 주요 빅테크 CEO와 연이어 회동했다. 이들과의 만남에서 최 회장은 AI 및 반도체 파트너십 구축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최 회장은 올 7월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국내 주요 AI 분야 리더들과 만나 AI 시대의 미래 전략을 논의하는 등 국가 차원의 AI 리더십 강화를 위해 다양한 노력도 기울였다.
이같은 최 회장의 든든한 지원이 SK하이닉스의 AI 메모리 리더 도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게 SK 경영진들의 하나 같은 증언이다.
곽노정 사장은 “최 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킹 덕분에 각 고객사, 협력사와 긴밀한 협업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며 “이 또한 AI 반도체 리더십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 바 있다.
SK 관계자는 “최 회장은 SK의 AI 밸류체인 구축을 위해 국내외를 넘나들며 전략 방향 등을 직접 챙기고 있다”며 “SK는 HBM, 퍼스널 AI 어시스턴트 등 현재 주력하고 있는 AI 분야에 더해 AI 데이터센터 구축 등 AI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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