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 부활’ 시동…갈길 바쁜 K-반도체, 또 추격자 늘었다

시간 입력 2024-02-26 07:00:00 시간 수정 2024-02-26 0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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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 일본 구마모토 1공장 준공…2공장도 연내 착공
일 정부, 1공장에 4.2조 지급…2공장엔 6.5조 지원
일 반도체 산업 재건 가속화…K-반도체 위기↑

TSMC 일본 구마모토공장. <사진=연합뉴스>

한국, 대만 등에 밀려 반도체 변방 국가로 전락한 일본이 ‘반도체 굴기’에 재도전한다. 최대 수조원 상당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파격적인 정책을 앞세워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인 TSMC 공장 유치에 성공하면서 반도체 강국 부활에 나섰다. 

반도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패권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K-반도체는 일본이라는 또 다른 경쟁자와 맞닥뜨리게 됐다.

TSMC는 지난 24일 일본 구마모토 1공장 준공식을 개최하고 시험 생산에 돌입했다.

이날 준공식에는 TSMC의 창업자인 장중머우 전 회장과 류더인 TSMC 회장, 사이토 겐 일본 경제산업상, 가바시마 이쿠오 구마모토현지사, 요시다 겐이치로 소니그룹 회장, 토요다 아키오토요타 회장 등이 참석했다.

장중머우 전 회장은 “구마모토 1공장은 일본 반도체 생산의 르네상스가 될 것이다”고 전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영상 메시지를 통해 “반도체는 디지털화와 탈탄소화에 필수 불가결한 기술이다”고 강조했다.

24일 열린 TSMC 일본 구마모토공장 준공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구마모토 1공장은 양배추나 당근 등을 재배하는 농촌 마을인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에 터 잡은 반도체 생산 시설이다. 약 21만㎡(약 6만3525평)에 달하는 부지 위에 클린룸과 오피스동, 가스 저장 시설 등이 들어섰다.

신규 공장은 ‘JASM(Japan Advanced Semiconductor Manufacturing)’이 운영한다. JASM은 구마모토공장 운영을 위해 TSMC가 만든 자회사로, 소니, 덴소, 토요타 등 일본 기업들도 출자에 참여했다.

해당 공장은 이미 시험 생산에 돌입했다. 1공장은 올해 4분기부터 12·16·22·28nm(1nm는 10억분의 1m) 공정 반도체를 본격 양산할 예정이다. 생산 능력은 300mm 웨이퍼 환산 기준 한달에 약 5만5000장 수준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서 제조된 칩은 첨단 반도체라 보기는 어렵다. 현재 가장 앞선 공정 기술이 3나노급인 것을 고려할 때 구마모토 1공장에서 생산된 반도체는 레거시(구형) 제품을 생산하게 될 전망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양산 가능한 최신 공정 기술이 40나노급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TSMC의 새 공장은 혁신 제품을 양산하는 요람이라 봐도 무방하다.

일본 언론들은 TSMC 구마모토 1공장에 대해 연일 “일본 반도체의 부활을 상징하는 공장이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TSMC 일본 구마모토공장. <사진=연합뉴스>

TSMC가 글로벌 생산 거점으로 일본을 낙점한 것은 일본 정부가 내건 파격적인 보조금 지원 정책의 영향이 매우 컸다.

일본 정부는 TSMC의 구마모토 1공장에 4760억엔(약 4조2037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이는 신규 공장 건설에 투입된 자금 1조1000억엔(약 9조7143억원)의 43.3%에 달하는 규모다. 반도체 생산 설비 투자금의 절반에 가까운 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점은 반도체 업체들에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일 수밖에 없다.

일 정부가 반도체 지원금을 현금으로 선지급했다는 점도 주효했다.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 확보 등 초기 투자 비용 부담이 큰 반도체 업체 입장에선 선지급 받은 보조금을 통해 재원을 한결 수월하게 확보할 수 있다.

일본 정부의 이같은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TSMC 공장은 당초 준공 목표 보다 훨씬 일찍 완공됐다. 2022년 4월 공사에 돌입한 구마모토 1공장은 준공까지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일 정부와 반도체 동맹을 맺은 TSMC는 일본 현지에 반도체공장을 추가로 더 짓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TSMC는 2027년 말 가동을 목표로 구마모토 2공장을 연내 착공키로 했다. 오사카 지역에 3나노 반도체공장을 건설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TSMC의 행보에 일본 정부는 즉각 화답했다. 교도 통신에 따르면 일본은 구마모토 2공장에 7300억엔(약 6조4502억원)을 지원한다는 방침을 굳혔다. 이는 1공장에 지급된 보조금 4760억엔 보다 2540억엔(약 2조2443억원) 더 많은 규모다.

이와 관련, NHK는 “구마모토 1·2공장 건설을 위한 TSMC의 투자 규모는 무려 2조9600억엔(약 26조1543억원)이 넘는다”며 “이를 고려해 일 정부는 2공장 건설 지원을 염두에 두고, 첨단 반도체 양산 지원을 위한 기금에 7600억엔(6조7000억원)을 포함시킨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대만 TSMC 본사. <사진=연합뉴스>

비단 TSMC 뿐만 아니다. 일본 반도체 산업 재건에 나선 일본 정부는 여타 반도체 업체들에게도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최근 일 정부는 일본 대기업들이 의기투합해 세운 라피더스의 홋카이도공장에 3300억엔(약 2조9158억원) 규모의 보조금을 지급키로 했다. 라피더스는 2022년 11월 토요타와 소니, 소프트뱅크, 키옥시아, NTT, NEC, 덴소, 미쓰비시UFJ은행 등 8개사가 설립한 차세대 반도체 업체다.

라피더스는 2027년부터 2나노 미만 차세대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현재 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코이케 아쓰요시 라피더스 사장은 “라피더스 설립은 일본 반도체 부활을 위한 마지막 기회다”며 “향후 5년 안에 일본에서 최첨단 반도체 양산에 돌입할 것이다”고 강조한 바 있다.

또 키옥시아(옛 도시바메모리)와 미국 웨스턴디지털(WD)이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할 미에현 욧카이치공장과 이와테현 기타카미공장에도 2430억엔(약 2조1471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 거점인 ‘최첨단 반도체 기술 센터(LSTC)'가 진행하는 기술 개발에도 450억엔(약 3976억원)을 투자한다. LSTC는 라피더스, 도쿄대, 이화학연구소 등이 참여하는 산학 협동 연구기관이다.

일본이 반도체 부활을 선언하고 나서면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K-반도체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산업연구원이 발간한 ‘미래 전략 산업 브리프’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대만과 우리나라가 경쟁하는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은 향후 2027년 이후 대만·한국·미국·일본 ‘4강’ 구도로 재편될 것으로 전망됐다.

김종기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의 강점인 반도체 제조 분야에 미국과 일본의 진입이 가시화하고 있다”며 “특히 일본의 약진이 매섭다”고 진단했다.

김 연구위원은 글로벌 파운드리 경쟁 구조 변화에 맞춰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시스템 반도체는 역량이 부족한 실정이다”며 “메모리 분야의 강점을 토대로 수요에 기반한 팹리스(반도체 설계) 역량을 강화하고, 산학 연계 및 협력 활성화를 통한 파운드리 성장 전략 추진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실제 글로벌 파운드리 부문에서 일본의 약진은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업체들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일본·대만 반도체 동맹의 산물인 TSMC 구마모토공장은 TSMC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 확대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TSMC를 맹추격 중인 삼성 파운드리 사업에 악재일 수밖에 없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TSMC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57.9%에 달했다. 삼성전자는 12.4%였다. 올 하반기 구마모토 1공장이 본격 가동되면 양사 간 점유율 격차는 더 벌어질 전망이다.

라피더스의 추격도 경계해야 한다. 전통적인 기술 강호 일본이 설립한 라피더스가 향후 2나노 미만 공정 기반 첨단 반도체를 앞세워 주요 고객사를 빠르게 선점한다면 삼성전자를 충분히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TSMC를 바짝 추격하고 동시에 인텔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반도체 첨단 제조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도입한 ‘GAA(게이트올어라운드)’ 기술을 기반으로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의 위상을 제고한다는 구상이다. GAA는 반도체 칩에 전류가 충분히 흐르도록 설계해 전력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고안된 신기술이다.

업계 안팎에서는 삼성이 GAA 기반 선단 공정에서 상당한 경쟁 우위를 확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2년 6월 세계 최초로 GAA 기술을 적용한 3나노 반도체를 양산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는 같은해 12월 3나노 생산에 돌입한 TSMC보다 반년 가량 앞선 것이다.

GAA 기술을 기반으로 삼성은 내년부터 더욱 미세한 2nm 공정 양산에 돌입한다는 구상이다. 삼성전자는 2025년 모바일용 반도체를 중심으로 양산을 시작해 2026년 HPC 공정에 적용할 계획이다. 2027년에는 이를 차량용 반도체로 확대한다.

초미세 공정 양산 계획도 세운 상태다. 삼성전자는 2나노 공정보다 훨씬 미세한 1.4나노 공정을 2027년부터 생산한다는 목표다. 최첨단 반도체를 앞세워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고 있는 AI 반도체 등 차세대 반도체 시장을 빠르게 선점한다는 게 삼성의 전략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고객사들이 AI 전용 반도체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며 “삼성전자는 AI 반도체에 가장 최적화된 GAA 트랜지스터 기술 혁신을 통해 AI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도하겠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화성캠퍼스. <사진=삼성전자>

GAA 기반 선단 공정에서 우수한 경쟁력을 갖춘 만큼 삼성이 2나노 공정 분야에서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란 관측도 있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2nm 공정부터 GAA 기술 적용에 따른 변곡점이 발생할 것이다”며 “3nm GAA를 이미 적용해 기술 완성도를 높인 삼성전자가 GAA 공정 안정성 측면에서 상대적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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