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산자위,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제외 반도체법 처리
여야 합의로 성사…“경쟁 심화 등 엄중한 산업 환경 고려”
삼성·SK 등 K-반도체 “아쉽다”…첨단 칩 경쟁력 확보 비상
韓, 엄격한 주 52시간제 고수…R&D 핵심 인력 운용 난항
“AI 반도체 호황에 정치권이 찬물…골든타임 놓치나” 비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사진=삼성전자>
전 세계를 휩쓴 AI(인공지능) 열풍에 힘입어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K-반도체가 나날이 밀려드는 AI 메모리 러브콜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삼성·SK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라는 심정으로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첨단 칩 역량을 더욱 끌어올려 세계 반도체 패권을 수성한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최근 국회가 ‘주 52시간제 예외’ 규정이 생략된 ‘반도체산업의경쟁력강화및혁신성장을위한특별법안(반도체 특별법)’ 처리를 서두르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의 근심이 깊어지고 있다. 반도체 주도권 확보를 위해 각종 규제를 철폐하는 주요 경쟁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첨단 칩 기술력 강화를 저해하는 주 52시간제를 계속 고수하고 있어서다. 이에 K-반도체의 요구를 져버린 정치권에 대한 볼멘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5일 정치권과 업계 등에 따르면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는 지난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전체 회의를 열고, 반도체 특별법을 처리했다.
이번 법안은 이언주·정진욱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철규·박수영·고동진 국민의힘 의원 등이 제출한 8개 법안을 통합한 산자위 차원의 대안이다.
법안에는 △대통령 소속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위원회’ 설치 △‘반도체 클러스터’ 지정 및 기반 시설 조성·지원 △전력·용수·도로망 등 관련 산업 기반 확충 △예비 타당성 조사 면제·인허가 의제 등이 담겼다.
또 2036년 12월까지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 회계’를 설치·운영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지원하고, 중소기업 위주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산업에 대해 지원 계획을 수립·시행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국민의힘 소속 이철규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장이 12월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19회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제9차 전체 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국내 반도체 업계의 염원이었던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조항은 이번에 처리된 법안에서 제외됐다.
여야는 합의를 이루지 못한 ‘주 52시간 근로 시간 예외 적용’ 문제에 대해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과 특성을 고려해 연구개발(R&D) 인력의 근로 시간 특례 등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소관 상임위에서 그 대안에 대해 계속 논의한다”는 부대 의견을 달고, 산자위와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기후환노위)에서 관련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글로벌 반도체 경쟁 심화 등 엄중한 산업 환경을 고려해 이같은 방식으로 반도체 특별법을 처리하게 됐다는 게 여야의 입장이다.
국힘 소속 이철규 산자위원장은 “반도체 업계가 요구한 주 52시간제 예외 등 근로 시간 유연화 특례가 반영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면서도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을 더는 미뤄선 안 된다는 절박함에 여야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김원이 민주당 의원도 “주 52시간제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국민의힘의 양해와 이해 덕에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며 “중국의 추격이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우리 업체들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다만 서일준 국힘 의원은 부대 의견에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이라는 문구가 명확히 들어가지 않은 데 반발해 이날 전체 회의장에서 퇴장했다.
김성원 국힘 의원도 “(반도체 특별법에서) 반도체 R&D 인력의 근로 시간 특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이를 제외하고 법안을 통과시킨다는 건 취지에 어긋난다”고 지탄했다.
그동안 여야는 K-반도체 지원을 위한 법안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산업계가 요구한 주 52시간제 예외와 관련해 갈등을 빚어 왔다. 이에 올 4월 민주당은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조항을 뺀 반도체 특별법을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으로 지정해 단독 처리에 나섰다. 패스트트랙 법안으로 지정되면 소관 상임위를 통과하지 않고도 180일 안에 자동으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 회부된다. 또 법사위 부의 후 90일 안에 국회 본회의에 회부된다.
이같은 절차에 따라 해당 법안은 올 10월 14일 법사위에 자동 부의됐다. 내년 1월 14일 이후에는 국회 본회의에 자동 상정될 예정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법안을 단독 처리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정치적 부담을 고려해 야당과 협상을 지속했다. 야당 또한 법안이 이미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돼 시간 끌기는 의미 없다고 판단했다는 후문이다.

결국 여야 합의로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조항이 빠진 반도체 특별법이 소관 상임위를 통과하면서 해당 법안 처리 속도가 한층 빨라질 것이란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일각에선 법사위를 거쳐 올해 정기 국회 마지막 날인 오는 9일 본회의에서 처리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주 52시간 근로 시간 예외 규정이 생략된 반도체 특별법 통과가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K-반도체는 좀처럼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특히 반도체 R&D 종사자에 대한 주 52시간제 예외가 적용되지 않은 데 따른 후폭풍이 매우 거셀 것이란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K-반도체의 첨단 기술 개발 경쟁력을 담보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통상 2년이 소요되는 반도체 신제품 개발 과정 중 시제품 검증에만 6개월에서 1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된다. 이 기간 중 R&D 핵심 인력은 시제품 집중 검증을 위해 3~4일 밤샘 근로가 불가피 하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미국·일본·대만 등 주요 경쟁국도 이런 이유를 근거로 반도체 R&D 인력의 무제한 근무를 허용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엄격한 주 52시간제로 인해 R&D 핵심 인력 운용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10월 22~24일 사흘 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SEDEX 2025’에서 공개된 SK하이닉스 HBM4 실물 제품. <사진=오창영 기자>
여야 정쟁으로 반도체 특별법 처리가 상당 시일 지연되는 동안 삼성·SK가 첨단 반도체 경쟁력 제고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지적도 있다. 반도체 특별법에 따른 반도체 직접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글로벌 업체들과의 주도권 다툼에서 점차 밀려났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 일본 등 주요국은 자국 반도체 업체에 보조금을 지급하며 첨단 칩 역량 제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의 ‘주요국 첨단 산업별 대표 기업 지원 정책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미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 업체인 인텔에 85억달러를 지급했다. 일본 정부도 라피더스에 63억4000만달러의 보조금을 투입했다.
그러나 같은해 우리 정부는 마땅한 법안이 없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보조금을 일절 제공하지 못했다. 간접 지원만을 고수하는 정책 기조로 인해 K-반도체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주요국의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 기조는 지난해에도 이어졌다. 미국은 메모리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61억6500만달러를 보조금으로 지급했다. 일본도 지난해 11월 일 반도체 업계에 10조엔을 지원하는 종합 경제 대책을 새로 발표했다. 중국도 역대 최대 규모인 64조원의 반도체 투자 기금 ‘빅펀드’를 조성한 상태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의 반도체 관련 인센티브 규모는 세액 공제를 포함해도 1조2000억원 수준에 그친다.

10월 22~24일 사흘 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SEDEX 2025’에서 공개된 삼성전자 HBM4 실물 제품. <사진=오창영 기자>
주 52시간제 고수, 직접 보조급 지급 지연 등으로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에 상당한 제약이 뒤따르면서 K-반도체가 중국에 역전을 허용했다는 참담한 분석도 제기됐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간한 ‘3대 게임 체인저 분야 기술 수준 심층 분석’ 브리프에 따르면 국내 전문가 3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 지난해 기준 한국의 반도체 분야 기술 기초 역량은 모든 분야에서 중국에 뒤처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고 기술 선도국을 100%로 봤을 때, 고집적·저항기반 메모리 기술 분야는 한국이 90.9%로, 중국의 94.1%보다 낮았다. 한국의 고성능·저전력 AI 반도체 기술 분야는 84.1%인 반면 중국은 88.3%로 더 높았다.
전력 반도체 분야의 경우도 한국 67.5%, 중국 79.8%로, 중국이 우위에 있고, 차세대 고성능 센싱 기술 분야도 중국(83.9%)이 한국(81.3%)에 앞섰다. 반도체 첨단 패키징 기술은 한국과 중국이 74.2%로 같게 평가됐다.
이런 와중에 최근 K-반도체의 첨단 칩 역량 강화를 위한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비관론마저 확산하고 있다.
AI 관련 칩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HBM, 그래픽용 D램, 저전력 D램 등 메모리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있고, 이로 인해 내리막을 걷던 반도체 칩 가격도 다시 고공행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K-반도체가 최대 수혜주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도래했는데도 불구하고 삼성·SK의 반도체 경쟁력 제고를 위한 법안 마련이 지체되면서 K-반도체가 메모리 업황 호황에 제대로 편승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삼성, SK등 국내 반도체 업체들이 주 52시간제 규제로 차세대 칩 개발에 온전히 몰두하기 어렵고, 이로 인해 AI 반도체 경쟁에 선제적으로 나서기 어렵다는 성토가 이어지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 정통한 관계자는 “K-반도체가 독보적인 칩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반도체 R&D 인력에 대한 주 52시간 근로 시간 예외 적용, 정부 정책 지원의 근거가 될 반도체 특별법이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며 “경쟁력 확보를 위한 골든타임을 놓칠 수도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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