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 누적 대미 투자 규모, 총 1650억달러 달해
CSA 따른 보조금 지연·관세 폭탄 피하려는 전략
삼성·SK도 대미 추가 투자 늘려야 하나 고민 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 대만 TSMC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비위 맞추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 ‘반도체 지원법(CSA)’에 따른 보조금 지급 지연, 반도체 등 주력 수출 품목에 대한 관세 부과 등 독소 정책을 앞세워 미 현지 반도체 생산 능력 확대를 꾀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에 발맞춰, 미국에 무려 1000억달러(약 146조1700억원)를 투자키로 하면서다.
TSMC가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약속했다는 소식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K-반도체의 근심은 급속도로 깊어지고 있다.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미국에 반도체공장을 건설키로 한 K-반도체가 관세 폭탄, 보조금 옥죄기 등 트럼프발 겹악재를 피하기 위해선 TSMC처럼 투자 규모를 더 늘려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4일 업계에 따르면 웨이저자 TSMC 회장은 현지시간으로 3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면담한 뒤, 미국에 1000억달러 투자를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TSMC는 향후 짧은 기간에 최첨단 반도체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최소 1000억달러를 새로 투자할 것이다”며 “신규 투자는 미 애리조나주에 5개의 반도체공장을 건설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 발표로 TSMC의 대(對)미국 투자는 모두 1650억달러(약 241조1640억원)로 늘어난다”며 “이것은 미국 및 TSMC에 엄청난 일이다”고 강조했다.
앞서 TSMC는 2020년 미국 애리조나주에 120억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투자 규모를 650억달러로, 5배 넘게 확대했다.
대규모 투자에 힘입어 최근 TSMC는 미 애리조나주 1공장(P1)에서 4나노 제품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2공장(P2)은 올해 상량식 등을 완료하고, 2027년 3분기부터 3나노 칩을 제조할 계획이다. 올해 기공식에 들어가는 3공장(P3)은 2027년 말까지 반도체 생산 설비를 설치하는 등 첨단 반도체 양산 준비를 차질 없이 진행키로 했다.
이런 와중에 기존의 투자 규모를 뛰어 넘는 1000억달러를 추가로 투입키로 하면서 TSMC의 대미 투자 규모는 무려 1650억달러까지 불어나게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 3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웨이저자 TSMC 회장(왼쪽)과 면담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TSMC의 대미 투자 확대는 관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으로 들어오는 반도체에 최소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탄이 현실화할 경우, 반도체에 고율 관세가 적용돼 미국으로 수출되는 칩 가격 경쟁력은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결국 TSMC는 이같은 위협을 회피하고자 미 현지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투자를 단행키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미 정부 또한 TSMC의 추가 투자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 덕분이라고 자평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은 “TSMC가 이번에 미국에 투자한 것은 CSA에 따른 보조금이 아닌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 때문이다”며 “그들은 관세를 피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 온 것이다”고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여러분은 트럼프 대통령의 힘을 보고 있다”고 밝혔다.
CSA에 따른 보조금이 온전히 지급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한몫했다. 올 1월 TSMC의 웬들 황 CFO(최고재무책임자)는 미국 CNBC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지난해 4분기에 이미 첫 번째 보조금으로 15억달러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이는 TSMC가 받기로 한 보조금 66억달러 중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전임 바이든 행정부가 약속한 TSMC의 보조금은 인텔(78억6600만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그러나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이 주요 반도체 업체들을 대상으로 CSA에 따른 반도체 보조금을 재검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자칫 지원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과 직면할 수 있다는 불안이 빠르게 확산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TSMC가 미국 내 투자를 크게 늘려 관세 부과 조치와 보조금 지급 지연 등을 동시에 타개하고 나섰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TSMC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주요 반도체 업체 중 처음으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내놓으면서 K-반도체 진영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미 현지에 반도체공장을 건설키로 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트럼프발 관세 폭탄과 보조금 지급 지연 등 겹악재를 극복하기 위해선 TSMC처럼 대미 추가 투자 계획을 내놔야 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건설 중인 삼성전자 파운드리공장. <사진=경계현 삼성전자 사장 인스타그램 캡처>
현재 K-반도체는 전임 바이든 행정부의 파격적인 지원 정책에 힘입어 미 현지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해 생산라인을 구축 중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1년 미 텍사스에 170억달러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현재 건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2030년까지 누적으로 약 450억달러를 투자해 미 텍사스주 테일러에 건설 중인 반도체 생산 공장에 추가로 신규 공장을 건설하고, 패키징 시설과 첨단 연구개발(R&D) 시설을 신축키로 했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4월 미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약 38억7000만달러를 투자해 차세대 HBM 등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에 AI용 AVP(어드밴스드패키징) 생산 기지를 구축하는 것은 SK하이닉스가 최초다. SK는 인허가 등 공장 설립을 위한 사전 작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SK가 미국에 첨단 칩 생산 시설을 완공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천명한 반도체 관세 부담을 단숨에 덜어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직 반도체공장 건립이 마무리될 때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예정이어서 향후 수년 간 트럼프발 관세 폭탄을 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 내에서 한국산 반도체의 인기가 고공행진 중인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반도체에 높은 관세를 부과한다면 K-반도체의 경쟁력은 급격히 저하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산업연구원은 지난해 12월 ‘트럼프 보편 관세의 효과 분석’ 보고서에서 미국이 관세를 부과할 경우, 한국의 대미 반도체 수출이 지금보다 4.7~8.3% 줄어들 것이라고 관측하기도 했다.
아울러 트럼프발 반도체 보조금 재조정 소식도 불안 요소다. 트럼프 행정부가 주요 반도체 업체들과의 기존 합의 내용을 뒤엎고 특정 조건들을 재협상하기 위해 보조금 지출 중단을 무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 이천사업장. <사진=SK하이닉스>
지난달 로이터 통신은 트럼프 행정부가 CSA에 따라 미국에 투자한 반도체 기업에 지급하기로 한 정부 보조금에 대해 재협상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는 주요 반도체 업체별로 기존의 보조금을 책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 요구 사항을 다시 검토하고, 보조금 지급 규모나 특정 조건 등을 변경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이번 재협상 과정에서) 반도체 보조금 지출 일부를 연기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당장 반도체 보조금 지급 중단이 현실화하면, K-반도체의 미국 내 생산라인 확대는 큰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이미 지급이 결정된 수천억~수조원 규모의 보조금을 받지 못할 경우, 미 현지 공장 착공 및 생산 지연 등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처한 상황이다. 반도체 관세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미 반도체공장 구축을 서둘러야 하지만, 또 CSA에 따른 보조금을 제대로 지급 받지 못해 당초 생산라인 확장 계획을 전면 재검토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일각에선 수십조원을 쏟아 부어 미국 내 반도체 생산 거점을 만들고 있는 삼성·SK가 트럼프 행정부의 배만 불리고, 실익은 거의 얻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K-반도체는 일단 미국 투자 계획을 변함 없이 그대로 추진하면서도, 통상 정책 동향을 예의주시하는 모습이다.
일각에선 미 현지에 신규 공장을 설립하려면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고 절차가 까다로운 만큼 국내 반도체 업체들이 대미 투자 확대에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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