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1심 무죄 이어 항소심서도 모두 무죄 선고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삼바 회계 처리 등 모두 적법
이재용 책임 경영 본격화…반도체 경쟁력 제고 기대감
삼성 초일류기업 재도약…등기 이사 복귀 한 목소리
‘이재용호’ 속도경영 위한 ‘제2의 미전실’ 부활 필요성 대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그동안 글로벌 경영의 족쇄로 작용해 온 사법 리스크 굴레에서 벗어나게 됐다. 법원이 ‘부당합병·회계부정’ 항소심에서 이 회장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지난해 2월 1심 무죄 판결 이후 약 1년 만에 다시금 혐의를 벗게 됐다.
이 회장이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 받으면서, 반도체 패권 회복, 미래 먹거리 발굴 등 ‘뉴 삼성’ 재건을 위한 경영 행보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삼성 반도체는 지난해 4분기 3조원에 못 미치는 영업이익을 거두며 경쟁사에 ‘메모리 최강자’ 타이틀을 내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상태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에 따른 리스크, 중국 AI 쇼크에 따른 충격파 등 글로벌 복합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강력한 지배구조 재건 작업도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서울고등법원 형사13부(백강진, 김선희, 이인수 부장판사)는 3일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 실장, 김종중 전 미전실 전략팀장,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 등 나머지 피고인 13명에게도 원심과 같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검찰이 제출한 주요 증거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보고서 조작, 합병 성사를 위한 부정한 계획 수립, 부당한 영향력 행사 등 부정 거래 행위와 관련한 검찰 주장 모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업무상 배임과 위증 혐의에 관해서도 합병의 필요성, 합병 비율 등에 관한 배임이 인정되지 않고, 공모나 재산상 손해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또 일부 피고인의 발언도 위증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이번 선고로 이 회장은 지난해 2월 5일 1심에서 무죄에 이어 1년 만에 또 한번 무결을 인정 받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3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부당합병·회계부정’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 회장의 부당합병·회계부정 관련 소송은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2020년 9월 이 회장 등 피고인들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자본시장법 위반과 업무상 배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이 회장 등 피고인들은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에 대한 분식 회계 의혹도 받았다. 검찰은 삼바가 2015년 합병 이후 회계 처리 과정에서 자산 4조5000억원 상당을 과다 계상했다고 봤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는 지난해 2월 1심 판결에서 이 회장의 19개 혐의를 전부 무죄로 판단하고, 이 회장 등 기소된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불복한 검찰은 즉각 항소했고, 지난해 11월 항소심 결심 공판에서 이 회장에 1심과 동일한 수준인 징역 5년에 벌금 5억원을 구형했다.
이번 항소심 판결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여겨졌던 사안은 바로 삼바의 부정 회계 혐의다. 지난해 8월 서울행정법원은 2015년 삼바가 삼성바이오에피스(삼성에피스) 지배력 상실 처리와 관련해 회계 처리 기준을 위반했다고 봤다. 이는 이 회장의 ‘부당합병·회계부정’ 1심 재판부가 삼바와 관련한 거짓 공시, 분식 회계를 한 혐의에 대해 무죄로 판단한 것과 크게 배치되는 것이다. 행정법원의 판결은 2심 재판부의 선고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변수로 급부상했다.
당시 행정법원은 “삼바는 자본 잠식 등의 문제를 회피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별다른 합리적 이유가 없는 상태에서 ‘단독 지배에서 공동 지배로 변경됐다’고 주장했다”며 “이에 시점을 2015년 12월 31일로 보고 삼성에피스에 대한 지배력 상실 처리를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회계 처리 기준을 위반해 삼성에피스 투자 주식을 공정 가치로 부당하게 평가함으로써 관련 자산 및 자기자본을 과대 계상한 것에 해당한다고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또 재판부는 삼바가 지배력 상실 시기로 2015년 12월 31일을 정해 놓고, 이를 위해 근거 자료를 임의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삼바와 관련한 거짓 공시, 부정 회계를 한 혐의에 대해서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바이오젠의) 콜옵션이 행사되면 삼바가 (삼성에피스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다는 사실이 주요 위험이라고 공시했어야 된다고 본다”면서도 “그러나 은폐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판결했다.
1심 판결에 불복해 1300여 쪽에 이르는 항소 이유서를 내고 항소심에서 2300여 건의 추가 증거를 제출하는 등 증거 능력 입증에 주력한 검찰의 주장이 받아들여질지도 큰 관심사였다. 당초 1심 재판부는 검찰이 삼바 서버 등을 압수수색해 확보한 전자 정보를 선별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위법 수집 증거로 보고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날 항소심은 검찰의 집요한 증거 능력 입증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검사의 주장처럼 (증거의) 선별 절차를 일반적으로 수사기관의 광범위한 재량 아래 둘 수 없다”며 “적법성과 절차적 정당성 확보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재판의 주요 증거였던 삼바 서버와 관련해서도 “압수수색이 적법한지에 대해 검찰의 증명이 원심과 같이 부족하다”며 “영장 범위를 넘어 저장 정보가 일체 압수된 게 아닌지 강한 의심이 든다”고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법률 대리인이 3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부당합병·회계부정’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무죄 선고가 끝난 후 이 회장은 별도의 입장을 전하지 않은 채 법원을 떠났다. 대신 이 회장의 법률 대리인은 항소심 재판부의 무죄 판결에 대한 소회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신 재판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면서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이제는 피고인들이 본연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이 장기간의 사법 리스크를 털어내면서, 앞으로 뉴 삼성 비전을 구체화하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할 것으로 점쳐진다.
그동안 이 회장은 사법 리스크로 인해 그룹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4년 넘게 이어진 재판으로 인해 오롯이 책임 경영에 매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2020년 10월 부당합병·회계부정 1심 재판이 처음 시작된 후부터 지난해 2월 최종 선고까지 약 3년 5개월 동안 110여 차례의 심리가 열렸다. 이 중 이 회장은 총 96차례 직접 출석했다. 뿐만 아니라 같은해 9월 이후 총 네 차례의 항소심 공판과 결심 공판, 그리고 이날 선고 공판까지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이 회장이 사실상 모든 재판에 출석하는 바람에, 반도체 경쟁력 제고,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한 지속 투자 등 굵직한 현안과 관련한 의사결정을 내리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지적이다.
결국 사법 리스크로 인한 이 회장의 경영 부재는 삼성의 미래 성장을 방해하는 악재로 작용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지난 몇 년은 삼성에 있어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평가했다.
이 회장이 사법 리스크로 내 몰리는 동안, HBM(고대역폭메모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등 핵심 분야의 경쟁력 약화로 삼성 반도체는 극심한 위기에 직면했다. 지난해 4분기에는 3조원에도 못 미치는 영업익을 기록하며, 경쟁사인 SK하이닉스(8조828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부진한 실적을 거뒀다.
안팎으로 경영 환경도 녹록치 않다. ‘미국 우선주의’를 천명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관세를 부과하며 통상 질서를 뒤흔들고 있고, 반도체 지원법(CSA)에 따른 보조금 지급을 중단할 조짐까지 보이는 등 ‘트럼프 리스크’에 따른 불확실성이 날로 커지는 상황이다. 저비용 구조의 중국발 AI 쇼크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새로운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3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부당합병·회계부정’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같은 글로벌 복합위기 상황을 돌파하고, 이 회장의 책임경영을 위해서라도 지배구조 혁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법위)도 이같은 주장에 힘을 더하고 있다. 삼성 준법위는 지난해 10월 ‘삼성 준법위 2023년 연간 보고서’를 통해 이 회장의 등기 이사 복귀를 공식적으로 촉구하고 나섰다.
이찬희 삼성 준법위원장은 연간 보고서 발간사를 통해 “삼성은 현재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국내 최대 기업이지만 예측이 어려울 정도로 급변하는 국내외 경제 상황의 변화, 경험하지 못한 노조의 등장, 구성원의 자부심과 자신감 약화, 인재 영입 어려움과 기술 유출 등 사면초가의 어려움 속에 놓여 있다”며 “삼성은 생존과 성장을 위해 과감하게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 위원장은 “삼성은 최고 경영진의 등기 임원 복귀 등 책임 경영 실천을 위한 혁신적인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법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회장이 삼성그룹을 책임 있게 이끌어 나가기 위해선 등기 이사 재선임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짚은 것이다.
현재 이 회장은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등 4대 그룹 총수 가운데 유일한 미등기 임원이다. 이 회장은 과거 국정 농단 사건에 연루되면서 등기 이사에서 물러난 바 있다. 그러나 미등기 임원으로 활동하다 보니 책임 경영에 상당한 제약이 따르고 있다.
다만 이 회장의 등기 이사 재선임 여부는 오리무중이다. 이날 재판이 끝난 후 ‘올 3월 주주 총회(주총)에서 이 회장이 등기 이사에 복귀할 예정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법률 대리인은 “저희가 답변을 드릴 수 있는 사안은 아닌 것 같다”며 답변을 피했다.
이 회장의 등기 이사 복귀와 함께, 삼성 내에 ‘제2의 미전실’이 재건돼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이 회장을 보좌하며 삼성그룹의 의사결정을 총괄할 컨트롤타워가 복원돼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은 2017년 그룹의 컨트롤타워였던 미전실을 폐지하고, 사업 부문별로 3개의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각 사업을 통합 관리하는 컨트롤타워의 부재로 업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돼 왔다.
일각에서는 현재와 같은 TF 체제가 삼성의 실적 부진에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성의 모든 부서가 제각기 따로 분리돼 유기적인 협업이 어려워지다 보니 과거처럼 일사 분란함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삼성의 주력 사업 차질로 이어졌다는 게 삼성 안팎의 판단이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장. <사진=연합뉴스>
재계도 삼성이 통일성 있게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컨트롤타워 부활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섰다.
국내 굴지의 여타 그룹들은 대부분 컨트롤타워를 통해 그룹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LG의 경우 지주사인 LG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고 있다. 이를 통해 그룹의 의사결정 사안을 계열사에 안정적으로 전달한다. SK도 SK수펙스추구협의회(SK수펙스)를 통해 계열사들이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재의 TF 체제로는 뉴 삼성 비전을 구체화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과거 미전실에 준하는 그룹 내 컨트롤타워를 부활시켜 이 회장이 그룹을 효율적으로 총괄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다.
준법위 역시 대내외적으로 위기 상황에 놓인 삼성그룹에 컨트롤타워를 재건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 위원장은 “어떤 사안에 있어서 준법위가 정말로 많이 고민하고 있다”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작은 돛단배에도 컨트롤타워가 필요한데, 삼성은 어마어마하게 큰 항공모함이다”며 “개인적 신념으로는 그룹 컨트롤타워 복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한편 검찰이 상고할지 여부에도 관심이 쏠린다. 재계 안팎에선 검찰의 상고 가능성을 점치면서도 대법원에서 결론이 뒤집어지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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